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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 부활제3주일

4월15일 [부활 제3주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복음: 루카 24,35-48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공동체의 힘> 오스카 와일드가 쓴 ‘별아기’라는 동화입니다. 두 나무꾼이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숲에서 금별 무늬가 있는 자루에 쌓여있는 한 아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둘 다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한 나무꾼이 그 아이를 가엽게 여겨 집으로 데리고 가서 키웁니다. 그 아이는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 형제들을 압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세상에서 자신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믿으며 거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병자와 노인,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고 돌을 던지며 놀리기도 합니다. 그를 따르는 다른 형제들도 모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며 그를 닮아갑니다. 그는 형제들의 대장이 되고 그 형제들은 마을에서 악한 아이들로 소문이 날 정도가 됩니다. 어느 날 가난한 노파가 구걸을 하며 그 집을 방문하였는데 역시 별아기는 그 노파에게도 돌을 던지며 놀립니다. 그 노파는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이 엄마라고 합니다. 금별 무늬가 있는 자루에 싸서 산을 넘다 그만 도적떼에게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별아기는 처음엔 믿으려고 하지 않다가, 나중엔 그 말이 설사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거지꼴을 한 사람이 엄마라면 자신은 엄마 없이 사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 노파는 슬픈 표정으로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별아기의 몸이 꼽추처럼 굽고 얼굴도 두꺼비처럼 돼 버렸습니다. 이젠 자신이 놀림당하는 꼴이 되었고 형제들도 더 이상 그와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후회를 하고 다시 엄마를 쫓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따듯이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엄마를 찾아 큰 도시까지 오게 되었는데 성문경비병들이 그런 불구자는 이 성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막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법사가 그를 돈을 주고 사서 그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산에 가서 금화를 발견하거든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금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별아기는 산으로 가서 아무리 금화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혼날 것을 두려워하며 돌아오는 길에 덫에 걸린 토끼를 발견하고는 불쌍하여 구해줍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금화 하나를 찾게 해 주었습니다. 기뻐서 돌아오는 길에 구걸하는 거지를 만납니다. 거지는 며칠을 굶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금화 하나밖에 없지만 별아기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빼앗길 것을 각오하고 금화를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성문으로 돌아왔을 때 경비병들이 별아기에게 인사하였습니다. 온 성의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반가운 얼굴로 노파와 아까 그 거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비병들이 들고 있는 방패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노파는 왕비로 거지는 임금으로 변했고 그는 그들의 왕자였던 것입니다. 세바시 462회 ‘위기는 나를 키워준 어머니였다’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안승준 한빛맹학교 교사는 마치 이 동화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그는 전교 1등을 넘어 세계 수학 경시대회에서 우승까지 하고 바이올린과 모든 면에서 뒤짐이 없는 세상에 자기밖에 없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6학년 때 수술 중 시력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특수 학교에 다니며 자신이 놀리던 장애인들에게 오히려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듯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다 누군가, 혹은 어떤 사건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추함을 깨닫고 이타적인 새로운 삶으로 바뀌어가는 인간 삶의 변화를 이렇게 동화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변화가 곧 공동체의 변화와 같다는 사실입니다. 도둑질이 싫어졌는데 계속 도둑질하는 무리에 속해있을 수 없고 게임이 싫어졌는데 계속 게임방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치푸리아누스 성인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천주교 신자들도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분명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이들의 공동체’라는 의미의 ‘에클레시아’란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교회는 그 본질상 같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함께 모인 곳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심’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만약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면 비록 교회라는 구체적인 테두리를 찾지 못했더라도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신과 같이 행동하는 이들의 집단을 만나게 되면 그 안에 소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다르면 자신이 아무리 원해도 그 무리에 머무르는 것이 힘이 듭니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 키워져서 자기만 아는 격리원숭이를 원숭이 집단에 데려다 놓으면 적응을 하지 못하고 외톨이가 됩니다. 공동체는 받았으면 주어야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훈련을 받은 이들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털을 손질해주었다면 자신도 또 다른 누군가의 털을 손질해주어야 합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이기적인 모습만을 계속 유지한다면 공동체에서는 기생충이나 모기와 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가 결국 사도단에서 퇴출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한 공동체에 오래 머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행위를 하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을 살기를 원치 않으면 가출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공동체는 그 공동체만의 행동양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냉담하는 분들을 ‘쉬는 교우’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교우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반면 교회에 나오지는 않더라도 그 부르심대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은 교우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러나면 공동체의 힘에서 벗어나려 하는 사람과 공동체의 힘 안으로 들어오려는 차이는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힘이 공동체 구성원들 개인들에게 힘을 줍니다. 개개인들이 가진 힘이 모인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개인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 안에 있다면 그 시스템대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행동양식이 있을까요? 바로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교회에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 뿔뿔이 흩어졌고 부활하셨을 때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이들이 모두 교회에 모여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도 바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자신들이 본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이나 다른 여인들의 증언,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증언 들은 사도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부활 자체도 믿기 어려웠지만 만약 부활하였다면 자신들에게 먼저 나타나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토마스도 교회 안으로 복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 안에 머무는 것 자체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는지를 증명해줍니다. 마치 별아기가 엄마를 만나고 만나지 않고의 차이가 명확하듯,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범주에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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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백광열

등록일2018-04-15

조회수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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