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후
신앙공동체 회복과 발전
빠른 신앙 공동체 회복
두세신부
- 병인년과 정묘년, 무진년 박해 때 흩어졌던 교우들이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박해가 잦아들자 다시 원머리 교우촌으로 돌아와 신앙공동체의 주역이 되었다. (양씨, 마씨, 한씨, 박씨, 조씨 등)
- 1880년 경부터 어느정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되는데 1884년 충청도를 전담하게 된 프랑스 선교사 두세(Douset)신부는 박해로 피폐해 있던 내포지역 공동체를 방문하게 되었다.
교회 재건에 진력한 그의 활동 보고서에 의하면 "...잿더미에서 소생한 내포에 작은 신자집단의 생겨났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듯 그 활동의 계기로 이 지역이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공소로 발전한 원머리 공동체
20C 초반 원머리 지형
- 원머리 지역은 초창기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이미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생활을 해 왔지만, 100년에 가까운 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나자(1873년) 곧바로 이곳 지역에서부터 원머리 공소(1876년)가 설립되면서 공동체가 활기를 띄게 되었다.
- 두세신부가 원머리를 첫 방문 했을 때(1883~4년)에는 원머리와 새터를 나눌 정도로 신자수가 증가하여 1885년 교세통계에 따르면 원머리 78명, 새터 72명의 신자가 있을 정도로 신앙공동체가 성장하였다.
- 그 후 근처에 새터(1886년), 음섬(1915년) 등 공소가 더 세워지는데 이는 모진 박해의 광풍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돌아 와 살고 또 복음이 활발히 전파되었음을 방증해 주는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