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루카 복음 21장 34~36절
<내가 편하고자 친 칸막이를 조금씩 제거해 봅시다.>
오늘 복음 끝에 보면 ‘늘 깨어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어떤 뜻일까.. 라는 것을 생각해 보다가, ‘칸막이를 치지 않는 것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주일에는 하느님 아버지를 외치고 기도하다가,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서는 폐수를 강으로 흘려보내는 일을 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시간과 일 하는 시간 사이에 칸막이가 쳐 있는 거 같죠.
서로를 간섭하지 않게 말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겁니다.
그 사이의 칸막이가 없다면, ‘하느님을 따르는 내가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걸까..
이 일은 강을 썩게 하고 죽게 하는 일일 텐데..’ 하는 고민과 갈등이 생겨나서 힘들겠죠.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갈등을 외면하고 회피하고자 칸막이를 치는 겁니다.
강론을 하는 저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강론과 일상의 삶 사이에 칸막이를 쳐 놓으면 마음은 편합니다.
‘강론대에서 하는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삶으로는 불가능해.. 그렇게 살 수 없지..’ 하는 생각으로, 글을 써서 강론하는 것과 삶 사이에 칸막이를 쳐 놓는 겁니다.
그러면 마음은 편하겠죠.
강론대 위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이 되게 전하면 되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서는 멋대로 살아가도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은 그렇게 칸막이를 쳐 놓고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칸막이를 치워버리는 작업을 하라고 하시는 거 같습니다.
늘 기도 안에서 들여다보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통합된 삶을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죠.
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식사 전후 기도를 바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숟가락을 듭니다.
성당에서는 괜찮은데 밖에서는 창피한 겁니다.
또 성당에서는 미소 짓고 친절한 듯 행동하지만, 운전하고 일할 때는 거칠게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죠.
‘여기는 성당이 아니니까.. 내가 신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성당에 와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칸막이를 치고 다른 사람과 구별 지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서는 마음이 편하죠.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생과 수고스러움도 없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한 용서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그 밖에도 많이 있을 텐데요.
그렇게 칸막이를 치고 부분적으로 그분을 따르다보면 언제가 그분에게서 멀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힘과 체력은 늘 깨어 기도하는 데에서, 곧 칸막이를 제거하는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는 데에서 길러지리라 생각합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 하루, 내가 편하고자 친 칸막이를 조금씩 제거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떤 계산법’에 나오는 이야기...
서울에서 대전이나 대전에서 서울이나지만,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다른 거 같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일주일 떨어져 있지만,
새해와 크리스마스는 엄청 떨어져 있다.
- 인천교구 김기현 요한 신부님